끼토산 야끼토 | 이진우 베트남 호치민시의 7월 오후 서너 시쯤 등이 하얀 제비들이 떼를 지어 먹구름을 몰고 날아오면 양동이로 퍼붓듯 스콜이 쏟아졌다 자전거와 오토바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텅 비고 검은 아스팔트 노란 중앙선이 눈부실 때 샛노란 우비를 입고 전속력으로 자전거를 몰던 한 사내가 있었다 장대비 쏟아질 때마다 그 사내가 떠오르고 입에서 저절로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총깡총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가 흘러나왔다 그 노란 산토끼는 어디로 그리 급히 가 버린 걸까 맑은 하늘에 대고 팔을 둥글게 저
시간의 나이 | 이진우 지구의 나이는 46억년 바람의 나이는 더 되었고 빛의 나이는 더 오래 되었다 빛보다 많이 나이 먹은 건 시간뿐 빛보다 빠르고 빛보다 오래 가고 빛보다 위대한 시간 시간은 운명을 만들고 운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과거와 미래를 만든다 정처 없고 의미 없고 보이지 않는 시간의 푸르고 검은 속 시간이 펼쳐 놓은 어느 한 공간에서 시간의 나이를 어찌 가늠하나 고민하다 우울증에 걸려 버린 한 사내가 문득, 시간을 정한 건 사람 내가 없어지면 시간도, 나이도 없어지겠지 하여, 큰 다리 난
금연 라이터 | 이진우 멀쩡하던 라이터가 자꾸 말썽을 부린다 몇 번씩 눌러야 겨우 불이 켜지거나 단번에 켜지기도 하는 계륵같은 오래되어 오히려 반짝이는 청동 라이터 때문에 짜증이 나서 담배 못 피겠다, 했는데 담배 끊으라는 계시가 아닐까 싶어 라이터를 다시 본다 담배는 쉼표였거나 마침표였다, 때론 출발 신호였다 적을 향한 총구였고 사랑을 피워 올리는 향로였고 (아, 지금도 담배 한 대를 피워문다) 오르가즘이었으며 절망이었다 온갖 감정이 담배 연기를 타고 어딘가로 사라질 때 마음은 망각의 강을 건너 안식
할아버지의 시계 | 이진우 내 할아버지의 시계는 선반에 놓기에 너무 커 90년 동안 마루에 세워져 있었어요. 할아버지 키의 절반 정도였지만 보기보다 가벼웠어요. 할아버지가 태어난 바로 그날 아침에 산 시계였어요. 할아버지의 보물이고 자존심인 시계였어요.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, 시계가 잠깐 멈칫하더니, 서 버렸어요. 90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틱톡틱톡 할아버지의 인생도 쉬지 않고 틱톡틱톡 할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의 시계도 영원히 멈춰버렸어요. 아들이 오카리나로 부는 미국 동요 ‘할아버지의 시계’를